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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남북회담 문서 공개…치열했던 '핵통제공동위'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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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시스중도6/30 01:00
    통일부, 남북회담 문서 공개…치열했던 '핵통제공동위' 협상

    [서울=뉴시스] 남빛나라 기자 = 남북이 상호 핵사찰 검증기구인 '핵통제공동위원회' 설치를 논의하다 결렬된 1990년대 초반 회담 문서가 공개됐다.통일부는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진행된 32차례의 남북 간 핵문제 협상 과정을 기록한 문서 3836쪽을 공개한다고 30일 밝혔다. 핵문제 협의를 위한 1~3차 대표접촉,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운영을 위한 1~7차 대표접촉,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접촉회의 등이다.지난 2022년 처음으로 일반에 남북회담 문서를 공개한 이후 여덟번째 공개이다. 이번 분량은 최초로 남북 당사자 간 북한 핵문제를 협의했던 시기의 회담 문서라는 의미가 있다.남북은 1991년 12월 3차례의 고위급 회담을 열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후 한반도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한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관련 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남한의 '조건 없는 상호 핵사찰' 제안과 북한의 한미 연합군사훈련 '팀스피릿' 중지 요구 사이에서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 직후인 1992년 1월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발표했다. 북한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시설 사찰 수용과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으로 호응하는 듯 했지만, 사찰에 진전이 없자 한미는 팀스피릿을 1993년부터 재개하기로 했다.이에 북측의 최우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는 "동족과 한 약속이 중요한가 아니면 외세인 미국과 한 일이 중요한가"(1992년 10월 22일 핵통제공동위 9차 회의)라고 반발하며 줄곧 팀스피릿 중단을 요구했다.핵통제위 결렬 속 한미는 결국 1993년 3월 팀스피릿을 재개했다. 이에 북한이 NPT 탈퇴 및 IAEA 안전조치협정 파기를 선언하며 '1차 북핵위기'가 일어났다.이번 공개 대상에는 2022년 공개문서 가운데 비공개로 분류됐다가 재심의를 거쳐 공개가 결정된 일부 문서도 포함됐다.새롭게 공개되는 내용으로는 소수의 공동취재진(풀 기자단)이 남북 통신선을 통해 보냈던 기사 원문이 있다. 1970년대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분야 회담 당시 풀 기자단이 취재한 내용들이다.공개된 남북회담 문서 원문은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통일부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국회도서관 ▲국회부산도서관 ▲호남권 통일+센터에서 열람하면 된다.남북회담 문서 공개 목록, 공개 방법 및 열람 절차 등은 남북회담본부 누리집(https://dialogue.unikorea.go.kr) 및 유관기관 등에 배포한 리플릿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south@newsis.com

  • 뉴시스중도6/30 01:00
    남북핵통제위 협상, "도둑"·"간첩" 설전…김일성 사진 찢기도

    [서울=뉴시스] 남빛나라 기자 = 남북이 1990년대 초 '핵통제공동위원회' 출범을 논의할 당시 '간첩', '도둑' 등 거친 언사가 오가며 회담 분위기가 상당히 격앙됐던 사실이 확인됐다.통일부는 30일 '남북대화 사료집' 가운데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진행된 32차례의 핵문제 협상 과정을 기록한 문서를 공개했다. 당시 남북은 1991년 12월 채택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근거해 상호 핵사찰·비핵화 검증 기구인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출범을 논의했다. 노태우 정부가 1992년 1월 한미 연례 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릿' 훈련 잠정 중단을 결정하자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시설 사찰을 수용하기로 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가입했다.하지만 북한의 사찰 비협조가 이어지자 정부는 1993년에는 팀스피릿을 재개하기로 했고, 북한은 팀스피릿 중지와 핵통제위 문제를 연계하며 크게 반발했다. 남한은 방어적 성격의 훈련인 팀스피릿 시행 여부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의혹 해소에 달렸다면서, 정기사찰뿐 아니라 특정 시기 사찰이 가능한 '특별사찰'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북한 군사기지를 포함한 '성역 없는 상호사찰'도 남한의 요구 사항 중 하나였다.1992년 10월 2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9차 회의'에서 공로명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는 IAEA의 사찰로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완전히 해소됐다는 북측 주장에 대해 "언제 도둑이 나 '도둑이요' 하고 소리 지르고 거리를 다니느냐"고 했다. 당시 북한이 받은 IAEA 사찰은 정기사찰이 아닌 임시사찰에 그쳤다. 북측의 최우진 대표는 "핵대국(미국)을 반대하는 생각을 해야지 도대체 외세와 야합해서 동족을 반대하기 위한 공동대응을 하겠다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일주일 만에 열린 핵통제위 7차 위원접촉에서 북한의 박광원 위원(조선인민군 소장)이 "남측이 1950년대에 실현하지 못한 북침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금 감행하는 핵전쟁 연습"이라고 말하자 남한의 정태익 위원(외무부 미주국장)은 "말도 되지 않은 소리 집어치워라"고 받아쳤다.6·25전쟁 책임 소재를 두고 양측이 논쟁하며 긴장감이 높아졌다.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김일성 북한 주석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계획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련 외무부 비밀문서들이 구소련 붕괴 후 공개된 바 있다. 남측이 이 사실을 언급하자 박광원 위원은 "귀측(남측)한테 달러에 매수돼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따위 소리 하지도 말라"고 우겼다.핵통제공동위 제12차 회의(1992년 12월 10일)에서 북한이 남한의 핵개발 추진설을 제기하자 공로명 대표는 "황당무계한 얘기를 해서 어안이 벙벙한데, 가만히 그 저의가 뭐겠느냐 해서 봤더니 이 역시 도둑이 자기 발이 저려서 그런 것"이라고 일축했다.나흘 뒤 열린 8차 위원접촉에서도 팀스피릿을 둘러싼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감정적인 말싸움이 이어지기도 했다.북측의 '당신' 호칭 지적에 남측이 '우리가 친한 사이니 그렇다'는 취지로 응수하자, 박광원 위원은 "내일 팀스피릿 안 하겠다고 내일 대답하지? 친하니까"라고 비꼬기도 했다.북측은 남측이 주한미군 지상군인 미8군 지시를 받아 핵탄두를 은폐할 시설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핵통제위 관련 협의를 지연시키고 있다는 억지 주장도 펼쳤다.이에 정태익 위원은 "몰래 간첩으로 와서 본 모양이지? 엉뚱한 소리 할 거냐?"며 짜증을 냈다.북측 최우진 대표는 "미국과 손을 잡을 때 결단을 내렸다면 다시 (팀스피릿을) 취소하는 결단을 내려야 되지 않는가"라고 요구했다.공로명 대표는 "팀스피릿 1993년 계획을 중지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귀측(북측)에서는 남북 핵상호 사찰에 있어서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사각지대가 없는, 성역이 없는 사찰'을 받을 용의가 없는가"라며 "또 이 사찰이 효과적이고 신뢰될 수 있는 사찰제도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사찰 제도를 받을 용의가 있는가"라고 재차 물었다. 팀스피릿 중지가 먼저라는 북한과 핵통제위 운영 방향이 합의되면 핵위험 해소에 따라 자연스럽게 팀스피릿도 중지된다는 남측의 주장이 공회전했다.핵통제위 제13차 회의(1992년 12월 17일)에서 공로명 대표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는 사진을 미리 준비해 북측에 건네기도 했다. 북한이 회의 때마다 남한이 '외세에 의존한다'고 비난하자, 북한이야말로 소련과 공모해 6·25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의도였다.이에 최우진 대표가 사진을 받자마자 김일성의 얼굴이 담겼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내 쨉니다(찢는다)"라고 흥분하며 일대 소란이 일었다. 북측 김수길 위원(외교부 연구원)은 "그쪽에서 도발하려고 계획했다"고 항의했고, 공로명 대표는 "그러니까 이 다음부터는 그런 이야기(남한의 외세 의존)는 하지 말라 이 이야기다"라고 받아쳤다. 사진을 두고 논쟁이 일며 속기록에 '쌍방 소란'이라는 표현이 12차례나 등장할 정도로 대립이 격화했다.최우진 대표는 "우리의 반핵 평화정책에 대해서 똑똑이 알아야 한다"며 "우리 영생불멸 주체사상이 바로 반핵 평화정책에 구현돼 있다"고 주장했다. 사료를 검토한 정승훈 남북회담문서공개 예비심사위원장은 "당시 남한은 팀스피릿 훈련 재개 문제를 마지막 카드로 썼지만 북한이 호응 대신 반발했다"며 "북한을 우리가 원하는 사찰 제도로 끌어올 레버리지가 부족했다고 평가한다"고 말했다.핵통제위는 결국 최종 결렬됐으며 팀스피릿도 1993년 3월 재개됐다. 이에 북한은 NPT 탈퇴 및 IAEA 안전조치협정 파기를 선언하며 '1차 북핵위기'를 불렀다. ◎공감언론 뉴시스 south@newsis.com

  • 동아일보중도보수6/30 01:13
    남북핵통제위 협상, “도둑”·“간첩” 설전…김일성 사진 찢기도

    남북이 1990년대 초 ‘핵통제공동위원회’ 출범을 논의할 당시 ‘간첩’, ‘도둑’ 등 거친 언사가 오가며 회담 분위기가 상당히 격앙됐던 사실이 확인됐다.통일부는 30일 ‘남북대화 사료집’ 가운데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진행된 32차례의 핵문제 협상 과정을 기록한 문서를 공개했다. 당시 남북은 1991년 12월 채택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근거해 상호 핵사찰·비핵화 검증 기구인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출범을 논의했다. 노태우 정부가 1992년 1월 한미 연례 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릿’ 훈련 잠정 중단을 결정하자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시설 사찰을 수용하기로 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가입했다.하지만 북한의 사찰 비협조가 이어지자 정부는 1993년에는 팀스피릿을 재개하기로 했고, 북한은 팀스피릿 중지와 핵통제위 문제를 연계하며 크게 반발했다. 남한은 방어적 성격의 훈련인 팀스피릿 시행 여부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의혹 해소에

  • 동아일보중도보수6/30 01:14
    통일부, 남북회담 문서 공개…치열했던 ‘핵통제공동위’ 협상

    남북이 상호 핵사찰 검증기구인 ‘핵통제공동위원회’ 설치를 논의하다 결렬된 1990년대 초반 회담 문서가 공개됐다.통일부는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진행된 32차례의 남북 간 핵문제 협상 과정을 기록한 문서 3836쪽을 공개한다고 30일 밝혔다. 핵문제 협의를 위한 1~3차 대표접촉,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운영을 위한 1~7차 대표접촉,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접촉회의 등이다.지난 2022년 처음으로 일반에 남북회담 문서를 공개한 이후 여덟번째 공개이다. 이번 분량은 최초로 남북 당사자 간 북한 핵문제를 협의했던 시기의 회담 문서라는 의미가 있다.남북은 1991년 12월 3차례의 고위급 회담을 열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후 한반도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한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관련 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남한의 ‘조건 없는 상호 핵사찰’ 제안과 북한의 한미 연합군사훈련 ‘팀스피릿’ 중지 요구 사이에서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노태우